기사 메일전송
[기획특집 제16회] 길 위에 세워진 석상 - 왕유동은 왜 역사의 무대가 되었는가?
  • 기사등록 2026-07-30 09:49:24
  • 기사수정 2026-08-04 23:51:22
기사수정
『도마상 프로젝트』는 아리랑타임즈가 문화유산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객관적인 자료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기록하는 장기 연재 기획입니다. 본 기획은 특정 결론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사실과 근거를 중심으로 다양한 견해를 독자에게 소개하고 함께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아리랑타임즈 특별기획 『도마상 프로젝트』 "잊혀진 문화유산을 기록하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탐사기획"

 

"산속에 홀로 남겨진 석상"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왕유동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한다.

 

    '어떻게 이런 깊은 산속에 석상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좁은 도로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면 마을은 점차 드문드문 나타나고, 계곡과 숲이 이어진다. 현대인의 눈에는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외진 산골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 연구에서는 현재의 지형과 과거의 지형을 동일하게 보는 순간 가장 큰 오류가 시작된다.

오늘날 조용한 산골이라고 해서 천오백 년 전에도 그런 곳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수많은 문화유산은 지금은 한적한 곳에서 발견되지만, 건립 당시에는 교통과 문화가 집중되던 중심지였던 사례가 적지 않다.

도마상 역시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왕유동은 정말 변방이었는가?'

 

                                                            AI Generated 


지도를 거꾸로 보면 길이 보인다

 

영주를 바라볼 때 많은 사람들은 행정구역만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강과 산, 그리고 길을 따라 움직였다.

영주는 소백산맥 북동부에 위치하지만, 동시에 낙동강 상류와 연결되는 중요한 내륙 공간이다.

 

영주 일대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영남과 중부 내륙을 연결하는 여러 육상 교통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사람은 물론 철과 소금, 농산물, 문화와 사상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다.

왕유동 역시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만 보면 깊은 산골처럼 보이지만, 고대에는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이 사람들의 생활권을 형성했다.

역사는 도로보다 오래된 길 위에서 만들어졌다.

 

 

교통은 문명을 만든다

 

고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문화유산의 입지를 분석할 때 '왜 이곳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진다.

사찰도, 성곽도, 고분도 우연히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석상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막대한 노동력을 들여 거대한 돌을 다듬고 세웠다면, 그 장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종교일 수도 있고, 공동체의 신앙일 수도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도마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왕유동이라는 공간을 이해해야 한다.

 

 

철의 시대, 길의 시대

 

3세기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철이 중요한 교역품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철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시장에서 화폐처럼 사용될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 자원으로 인식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당시 한반도 남부가 활발한 교역망 속에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철 교역은 특정 지역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철 생산으로 널리 알려진 가야 세력이 있었으며, 철은 왜와의 교역뿐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에서도 중요한 물자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철은 바닷길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강과 계곡, 육상 교통로를 따라 북쪽 내륙으로도 운반되었을 가능성이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남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영주 역시 이러한 교통망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곧 왕유동과 직접 연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왕유동을 '세상과 단절된 산골'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철을 주생산품으로 한 가야의 중국 등 서방과 북방과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이미지. AI Generated>

 

 

도마상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도마상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은 제작 연대다.

그러나 제작 연대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이곳에 세워졌는가?'

 

그 질문의 답은 단순히 석상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의 길과 사람, 교류와 생활을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는 유물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물이 서 있는 공간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왕유동의 석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장소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장소만으로는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한 길목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오가지 않았다면 석상이 세워질 이유도 찾기 어렵다.

결국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과연 고대 사람들은 왜 이 길을 오갔는가?

 

그 답은 의외로 하나의 금속에서 시작된다.

 

철(鐵)

 

당시 철은 단순한 생활도구가 아니라 국가를 움직이고 사람을 이동시키며 문명을 연결한 전략 자원이었다.

 

 

철은 길을 만들고 사람을 움직였다

 

고대 사회에서 길은 먼저 만들어지고 사람이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길이 생겨났고, 물자가 흐르면서 길은 더욱 넓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을 움직인 것이 철이었다.

 

오늘날 철은 흔한 산업 자원이지만, 약 1,8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철은 국가의 부를 상징하는 전략 자원이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화폐를 대신할 만큼 높은 가치를 지녔다.

 

이 사실은 중국 진수(陳壽)가 3세기 후반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출철(國出鐵), 한(韓)·예(濊)·왜(倭)가 모두 와서 이를 가져가며, 모든 시장에서 철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짧은 문장이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당시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를 비롯한 철 생산 지역은 철을 기반으로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교역은 왜와 중국을 포함한 주변 지역과의 해상 교류뿐 아니라, 한반도 내륙으로 이어지는 육상 교통망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은 철을 따라 움직였다

 

철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인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시장이 생긴다.

시장이 형성되면 길이 만들어지고, 길은 문화를 이동시킨다.

 

고고학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원리를 여러 유적에서 확인해 왔다.

낙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대량의 철기와 제련 유적은 이 지역이 동아시아 철 문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지역과의 교류 역시 이러한 철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즉, 철은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사람과 문명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철은 강을 따라 흐르고 길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의 철은 바닷길을 통해 왜와 중국으로 이동했을 뿐 아니라, 육상 교통망을 따라 내륙 각지로도 운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물자와 함께 이동했고,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길이 형성되었다.

 

영주는 예로부터 영남과 중부 내륙을 연결하는 여러 교통로가 만나는 공간으로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오늘날에는 조용한 내륙 도시처럼 보이지만, 고대에는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통로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왕유동 역시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 도마상과 직접 연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왕유동을 '세상과 단절된 공간'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영주는 변방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바닷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생각한다.

그러나 내륙 역시 중요한 무대였다.

 

고대 국가들은 강과 산맥을 따라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켰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일은 국가의 존립과도 직결되었다.

 

영주는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낙동강 수계와 이어지는 지리적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이 지역은 단순한 산간 마을이 아니라 여러 문화가 오갈 수 있는 접점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이러한 교통망 위에 세워진 석상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석상은 길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는가?

 

우리나라에는 오래전부터 마을 어귀나 고갯길, 강가에 다양한 석조 조형물이 세워졌다.

이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를 상징하거나, 길을 지키거나, 경계를 표시하거나,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왕유동의 석상을 연구할 때에도 먼저 '왜 이 장소였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제작 시기와 성격을 논할 수 있다.

 

석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연대만 논하는 것은, 책의 마지막 장만 읽고 내용을 판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의 가설, 그러나 아직은 가설이다

 

최근 일부 연구에서는 고대 철 교역망과 내륙 교통로를 연결하여 영주의 역사적 위치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왕유동의 입지를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교통망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도마상이 세워졌다는 결론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사료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비교적 확인할 수 있지만, 후자는 아직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한 연구 과제이다.

 

아리랑타임즈는 이 둘을 구분하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new.jookyung.com/news/view.php?idx=8709
  • 기사등록 2026-07-30 09:49:24
  • 수정 2026-08-04 23:51:22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여행소식] 필리핀 은퇴비자 한국인 1만4천700명…중국 이어 두 번째
  •  기사 이미지 [신간] 접촉과 교류가 낳은 산물…'서양의 탄생'
  •  기사 이미지 [속보] 李대통령 "한국형 AI생태계 구축에 정부·민간 역량 총결집"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