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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이순신 장군 초상

                                  조선왕조실록 속의 녹둔도(6)

 

녹둔도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녹둔도는 둔전(屯田) 설치와 관련하여 분분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효용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기 어려웠기도 하거니와 이후 변방의 정세가 바뀌면서 아쉽게도 선조 이후로는 서서히 녹둔도에 대한 언급이 차차 사라져 가게 된다.


선조 22년 4월 1일 정축

 

백성을 구제할 것과 김귀영 등 조정 대신을 탄핵한 전 교수 조헌의 상소문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은 강물을 등지고 농사짓고 있으므로 공의(公議)가 크게 불가하다고 했는데도 여러 사람의 논의를 극력 배척하여 남관(南關)의 백성을 대량으로 죽였습니다. 또 조종(祖宗)의 좋은 법을 무너뜨리어 간혹 문관(文官)을 부사(府使)나 판관(判官)으로 임용하여 북방 백성을 다스리게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무인(武人)만을 기용하여 멋대로 횡포를 부리게 하여 백성과 오랑캐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남녘의 곡식을 수송하고 또 남녘의 군사를 동원하려 하였으나 내지(內地)의 힘만 고갈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해마다 남녘의 승려를 부려 부질없이 장성(長城)을 쌓음으로써 사찰이 대부분 비고 반 이상이 적당(賊黨)에게 붙게 하였습니다.

 

선조 21년 7월 1일 임자

 

권징을 인견하였을 때 논의된 북변을 일을 비변사가 회계하다

 

........권징(權徵)이 인견(引見)하였을 때, 고미평(古未坪)이 분탕(焚蕩)될 때 생포한 호녀(胡女) 1명을 그 본토(本土)로 환송시킬 것을 주청하였고, 또 마천령(磨天嶺)과 마운령(磨雲嶺)에 관(關)을 설치하여 달아나는 백성을 단속할 것과, 모든 고을 중에서 유휴지를 가려 둔전(屯田)을 개설하면 천여 석(石)이 나올 땅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꼭 녹둔도(鹿屯島)만을 유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변장(邊將) 중에 남방의 배 타는 재주를 익힌 자는 남방에, 북방의 형세를 아는 자는 북방에 사용할 것이고 굳이 이수 환임(移授換任)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청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비변사(備邊司)가 회계(回啓)하기를........

 

선조 30년 1월 27일 무오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金景訥) 역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胡人)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의 장수로서 서로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김경눌은 매양 공(功)을 세우는 데 뜻을 둔 사람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평일에 자부하던 기개를 어찌 난시(亂時)에 시험하지 않고 있는가.“

 

선조 38년 5월 29일 임인 

 

서성과 김종득의 죄를 논하고 그 후임자에 대해서 의논하다


상이 이르기를,

 

"둔전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육진(六鎭)에는 반드시 둔전을 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전일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鹿屯島)에 둔전을 설치했다가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둔전도 쉽지는 않다." 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녹둔도의 경우 크게 벌렸던 까닭에 성공하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각 진보(鎭堡)에 각각 군사를 늘려 편리한 대로 실행한다면 군량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충국(趙充國)도 한편으로는 수비하고 한편으로 둔전하였으니, 지금 그 계모를 따라 둔전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효종 3년 5월 16일 병술

 

전 장령 안방준이 대동법 실시의 폐단을 상소하다.

 

 선묘조 때 국가를 맡은 대신이 밀도 있는 계획과 원대한 생각이 없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으로 백성들을 추쇄(推刷)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그 당시 제신들은 역시 오늘날의 제신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관망하여 부회(附會)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조헌(趙憲)만이 상소하여 그것이 불가함을 진달하였으나 묘당에서는 듣지 않아 결국 기축년의 변란이 있었습니다.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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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1-29 15: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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