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산
녹둔도
조선왕조실록 속의 녹둔도(3)
선조 재위시절은 녹둔도의 이름이 가장 많이 기록된 시기이자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록된 글들을 옮겨보도록 하자.
선조 16년 12월 1일 기유
경흥 녹둔도에 둔전을 실시하다
이 해에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 둔전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건의를 따른 것으로 부사(府使) 원호(元豪)가 주관하였다. 녹둔도는 강 북쪽 언덕과 가까워 사람들과 말이 통행하였으며 오랑캐 마을과 지극히 근접해 있었으므로 방책(防柵)을 설치하고 이졸(吏卒) 약간 명을 두어 방수(防戍)케 하였으나 수비가 매우 약하여 지방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선조 20년 9월 1일 정해
적호가 녹둔도를 함락시켜 둔전이 폐지되다
적호(賊胡)가 녹둔도(鹿屯島)를 함락시켰다. 녹둔도의 둔전(屯田)을 처음 설치할 적에 남도(南道)의 궐액군(闕額軍)을 예속시켜 경부(耕夫)로 삼았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수확이 없었다. 이 해에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그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는데 가을에 풍년이 들었다. 부사 이경록(李慶祿)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이순신과 추수를 감독하였다.
추도(楸島)의 호추(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가 경원(慶源) 지역에 있는 호인의 촌락에 화살을 전달하고서 군사를 숨겨놓고 몰래 엿보다가 농민이 들판에 나가고 책루(柵壘)가 빈 것을 보고 갑자기 들어와 에워싸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였다.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임경번(林景藩) 등이 포위를 뚫고 책루로 들어가다가 모두 화살을 맞아 죽었다. 마니응개는 참루(塹壘)를 뛰어넘어 들어오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다.
적호(賊胡)가 10여 인을 살해하고 1백 60인을 사로잡아 갔다. 이경록·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된 사람 50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병사(兵使) 이일(李鎰)이, 이순신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자신은 벗어나기 위하여 형구를 설치하고 그를 베려 하자 순신이 스스로 변명하기를,
"전에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신보하여 더 보태주기를 청하였으나 병사가 따르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공첩(公牒)이 있다." 하였다. 이일이 수금하여 놓고 조정에 아뢰니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贖罪)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수병(戍兵)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호당(湖堂)에 명하여 시를 지어 조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둔전(屯田)이 폐지되었는데, 논하는 이들은 정언신(鄭彦信)이 실책(失策)한 것으로 탓하였다.
이순신이 순변사(巡邊使)의 휘하에 종군하여 반로(反虜)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드디어 죄를 사면받았는데 이로부터 유명해졌다.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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