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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어지는 관심

 

  선조때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단호한 대응에서 볼 수 있다시피 녹둔도는 조선전기부터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족의 내륙침입을 막는 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세종대 6진을 개척하며 경흥에 행정적으로 소속되면서 역사에 편입된 이래 적어도 선조 때까지는 녹둔도에 대하여 국왕이 조선의 영토이자 군사적 거점으로서 확실한 인식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광해군 이후 영,정조를 지나면서 점차 그 이름이 조선 역사에서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후금이 성장하면서 만주지역에 긴장관계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정부가 녹둔도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청국 건국 이후 여진족의 정치체(政治體)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두만강을 넘어 녹둔도를 침략하는 집단이 사라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호란(胡亂)을 겪으면서도 녹둔도 인근에 대한 방어나 침략이 없었는데 이것은 대외적 관계가 변화하면서 녹둔도의 지정학적 중요도가 그만큼 감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로 가면서 녹둔도는 이처럼 중앙으로부터 점차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원래 범람으로 습지가 많고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척박한 이 지역이 황무지로 방치되면서 군사시설로도 활용되지 않는 무인도로 점차 바뀌고 만다. 더구나 18세기 이후부터 19세기 후반에는 두만강 물줄기가 바뀌고 침식에 의한 퇴적물의 변화가 생기면서 연해주와 연결되는 연륙화가 일어나는 등 급속한 환경 변화까지 겪게 되는데 거의 10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점점 더 사람의 거주와 농경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바뀌고 더 이상 섬이라 부르기 어려운 지형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18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녹둔도의 군사적 기능은 상실되었으며, 이후 행정적인 관할도 공백기에 접어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방관와 무관심이 점차 발전하여 철종대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인들이 녹둔도를 점유하는 것을 정부조차 알지 못할 정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두만강의 바뀌는 물길과 녹둔도의 움직임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중화 중심의 세계관에 묻혀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의 힘겨루기의 흐름을 냉철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변화의 바람을 감지 못했던 조선의 무관심과 무지함은 결국 1860년 베이징조약과 연이어 흥개호(興凯湖) 조약 등이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경흥부 인근의 사초봉(莎草峯) 부근 봉우리에 국경비가 세워지는 것도 모르는 채 두 손 놓고 있게 만든 것이다. 이후 조선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고종대에 이르러서야 녹둔도의 가치를 파악하고 그 회복에 힘쓰게 된다. 

 

   1883년 고종의 명을 받은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녹둔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 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고종은 또 김광훈과 신선욱을 밀사로 파견해 녹둔도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들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를 새겨 넣었다.

또한 1899년(광무 3) 청국과 러시아 간의 국경 재감(再勘) 때는 청나라 대표인 오대징(吳大徵)에게 녹둔도 반환교섭을 의뢰하였고,러시아와 국교를 맺은 뒤에도 러시아 공사에게 녹둔도의 반환을 요청하는 등 나름의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결국 녹둔도는 반환되지 못한 채 크라스노예 셀로라는 이름의 조선인 정착촌이 된다. 이후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녹둔도에 살던 조선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들이 떠난 자리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고 말았다.


                                    그림  아국여지도 중 녹둔도도 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녹둔도(鹿屯島)]



                                            흐린 기억 속의 그대

 

   1984년 11월 북한과 러시아 간에는 국경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녹둔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되었다. 1990년 한국에서는 서울주재 러시아대사관에 녹둔도를 반환해 줄 것을 건의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그리고 북한은 1990년 옛 소련과 북경조약을 그대로 이어받은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결국 북한이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해 준 셈이다.

 

   녹둔도는 현재 러시아의 군사통제지역으로 묶여있다. 관련전문가들은 통일 이후에도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 맺은 조약과 관행을 그대로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즉 통일 후에도 녹둔도가 우리 영토가 되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유동적인 것이고 현재 영토분쟁지역으로 관심이 높은 센카쿠열도나 쿠릴 4개섬 등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역사적, 지리적, 인문적 정당성은 훨씬 앞서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제국주의의 무력을 통한 식민지 분할이 일어났던 시대의 야만과 국제법적 헛점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간다면 불과 160여 년의 점유는 말 그대로 근거 없는 궤변이라고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가지는 조선후기 지형의 변화로 연해주에 연육되고 농경에 부적합한 지역이 되고 국제 관계가 움직이는 분위기속에서도 녹둔도에서는 끊임없이 조선인의 이주와 거주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대한제국기는 물론 일제 강점기에도 러시아인보다 조선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지역의 경제권도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 말기 어지러운 정치판에 변방에 대한 관심이 소홀한 틈을 타 러시아가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일시 점유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청국과 러시아 간에 이루어진 국제조약에 따라 녹둔도가 러시아령이 되었다는 국제법상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측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현재 러시아의 녹둔도 영유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정부가 발행한 지도에도 녹둔도가 한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제 우리가 무엇인가 말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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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1-01 17:08:34
  • 수정 2022-11-02 15: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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